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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박씨 소개 > 무안박씨 유래무안박씨 역사
본관(本貫) 유래
박씨는 기원전 57년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왕의 후손들이다.
신라의 왕위는 세습하지 아니하고 박·석·김 씨가 번갈아 통치하다가 김씨 왕조에서 백제 고구려를 통합하여 통일신라시대를 열었다.
국토가 넓어진 전국의 땅을 9주(州)로 나누어 군(郡) 현(縣) 지방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신라 천년동안 박씨 후손들이 번성하여 분가하여 큰 가문을 이루고 여러 군현에 지방관으로 임용되어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호남은 땅이 비옥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는 요충지이다.
나주, 무안, 반남이 박씨 호족(豪族친족집단)의 세거지가 되었다.
신라는 국운이 다하여 중앙정부에 국력이 약화되어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지방의 호족이 막강한 경제력과 사병을 일으켜 지방권력을 장악하여 중부 철원에서 궁예가 일으킨 태봉국과 견훤이 호남을 장악한 후백제로 후삼국 시대로 분열된다.
당시 신라의 왕은 박씨 성의 경명왕 경애왕이다.
개성의 호족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신라의 천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라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수도 개경에 인질로 보내어 중앙 정부에 충성을 강제하게 하였다 이를 기인제(其人制)라한다. 인질로 개성에 온 자제들을 교육을 받게 하며 관직에 임용함으로 지방의 호족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며 그들의 발호를 억제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태조 왕건은 모든 백성은 본관(本貫:출신지)과 성씨와 이름을 갖도록 하여 씨족의 대표에게 본관과 성을 내려주었다.
이를 사성(賜姓) 또는 수관(受貫)이라 한다.
이때부터 본관이 같은 성씨의 씨족공동체 문중이 형성되었다.
무안박씨 시조 진승(進昇)은 무안에서 고려조(高麗朝)의 관직에 진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무안박씨의 시조(始祖)로 수관(受貫) 받았다.
일명 관조(貫祖) 라고 부른다.
시조 진승의 경력은 고려 성종왕조(981~997)에서 국자감 좨주(祭酒)로 학무를 총괄 하셨으며 거란이 침략 때에는 고주(高州원산부근) 의 방어사로 배명 받고 거란을 물리친 공훈으로 무안군(務安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무안인 진승(進昇)이 무안박씨의 시조가 된 것은 무안의 호족의 자제로서 기인제도(其人制)에 의하여 선임되었거나 광종 때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여 학문의 실력을 인정받아 성리학자로서 국자감 좨주(祭酒)에 제수되었다고 전승된다.
이를 증거 하는 것은 고려사이다.
고려사는 성종이 국자감을 설치하고 고주성에 처음 방어사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중이 번성하여 분가한 가정마다 가첩(家牒계보)을 기록하므로 토성(土姓 본관+성씨)의 역사는 고려 초 10세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분가한 가문의 보첩을 수거하여 가깝고 먼 촌수에 따라 한 족보에 올려는 문화는 고려 말 13세기부터 시작하였다고 하니 3세기 전 먼 조상은 모를 수 있다.
조상을 잃어버리는 가문이 종종 있으며 가문의 역사 년 수에 비하여 대수가 부족할 수 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족보는 언제부터 발간하였을까?
우리나라의 각 성씨의 대동보(大同譜) 발간은 조선시대 안동 권 씨 성화보가 15세기 처음이며 대게는 조선 건국 3백년 후 17세기에 시작되었다.
무안박씨의 처음 족보는 1711년 신묘보(辛卯譜)이다.
고려의 족보라는 문화가 전승된 지 대게 6세기 만에 인쇄로 발간되었다
조선사회는 양반 상민 천민(노비)으로 이루어진 신분사회이다.
천민은 성이 없이 살았고 이름만 지어 불렀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1894년)으로 신분제를 폐지하여 노예가 해방되고 평등사회가 되는 첫걸음을 떼었다.
이어 일제 강점기(1909년) 호적에 관한 법률 “민적법”을 제정하여 호적이 없는 백성은 신고하여 성과 본을 지어주어 본과 성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 성을 받는 사람은 명문가의 성을 선호하여 성씨 분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5년 인구 조사는 박씨 본관이 120여개이고 인구는 420만이라 한다.
무안박씨의 인구는 약 9~10만 명으로 5위를 점하고 있고 밀양이 1위이고 나머지는 소수파로 분포되어 있다.
새 시대는 디지털 시대이다. 2024년 발간한 갑진보(甲辰譜)를 디지털 족보로 전산화 한 것이다.
무안박씨 족보 약사
무안 박씨 족보는 초정(應善)선생이 기해년 1599년 가장보(家藏譜)를 창보 하시고 이를 표준삼아 증손자 사인공 정(涏) 울산공 징(澄) 종형제가 증조부께서 못다 한 족보를 증보하여 1711년 신묘보(辛卯譜) 필사하여 만들었다.
재정상 간행을 못하다가 1754년 간행할 제 갑술보(甲戌譜) 네 권의 책으로 중수(重修) 편찬하였다.
갑술보의 편집은 보학을 공부하여 백씨보략(百氏譜略)책을 낸 농아 사정(聾啞 思正)선생이 감수하였다.
족보 책머리에 족보를 숙고하건데 고려시대 조상은 오래되어 상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의심되는 것은 년수(年數) 는 많고 세수(世數) 적다 적시(摘示)하였다.
후일 고증하여 바로 접으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시조 진승이 성종 때 수관(受貫) 받았으면 서기981~997이고 고려가 1392년 망하였으면 년수가 약4백년인데 무안박씨 세수(世數)는 10세에 불과하니 조상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하였다.
무안박씨는 1754년 갑술보 판본으로 발간하여 보급한 이래
1802년 임술보(壬戌譜)
1849년 기유보(己酉譜)
1927년 정묘보(丁卯譜)
1974년 갑인보(甲寅譜)
1984년 갑자보(甲子譜)
2025년 갑진보(甲辰譜) 증보(增補) 대동보를 발간하여 왔다.
무안군부인박씨 묘지명(務安郡夫人朴氏墓誌銘)
부인의 성은 박씨이고 가계는 무안에서 나왔다.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장군 박부(朴琈)의 셋째 딸이며
광정대부 도첨의시랑 찬성사로 추봉되고 행 봉익대부 판도판서 문한시학으로 치사하신 최서(崔瑞) 배필이다.
할아버지는 조산대부 병부시랑 금오위 섭장군 박성기(朴成器)
증조할아버지는 통의대부좌우위대장군 지병부사 박유(朴蕤)이다
어머님은 선(蘚)씨는 협계군부인(俠溪郡夫人)으로 봉해졌고
외할아버지는 조정대부 금오위대장군 박대유이다.
부인은 23세에 최공에게 시집갔는데 공은 문헌공 최충의 현손이다 모두 4남2녀를 낳았다 (중간 생략)
향년 70세 무오년(1318년)에 고종명하셨다. 이하 생략
묘지명 박씨부인은 아버지가 밀직부사 부(琈)라고 하였으니 7세 면성군 문오(文晤)과 남매간이다.
묘지명으로 확인된 7세 면성군의 가계도
고조부 윤위(족보3세)명종1170년→ 증조부 유(족보4세) 강종1213년 →조부 성기(족보5세) 고종1240년 →부친 琈(족보6세)원종 1274년 →문오. 문연. 딸(족보7세) 충렬왕 1300년
현재 족보의 2세 섬은 현종왕조(1009~1031년)의 인물이 틀림없으니 면성군의 가계도 3세 윤위 와 120년 년차가 있다.
무안박씨 묘지명 밝혀지므로 윤위를 아들로 올린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세~3세 사이에 조상을 3대는 잃은 것으로 하여 이번 갑진보는 3대를 공란으로 비워 두었다.
처음 족보 갑술보에 세수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보정하게 된 것이다.
무안박씨 종사연구위원장 ,경파 회장 熙文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