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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파는 제7세 휘 문오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의 제5남 휘 윤류 군부정랑공(軍部正郞公)의
후손으로
제13世 휘 이 평강공(平康公)의 제2남 휘 임경 숙천공(肅川公)의 직계자손이다.
숙천공의 호는 의암이시니 1436년(世宗 18) 병진에 서울에 서 출생하였다. :
공께서는 매죽헌 성삼문선생의 사위이며 여러 관직을 거쳐 황주목사(黃州牧使)와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를 지냈다.
공의 제2남 휘 증(增) 호 암천공(巖川公)께서는 1461년 세조 (世祖) 6년 신사에 서울에서 출생하고
1488년대에 충청도 계룡산하 (鷄龍山下) 노성현 동쪽 암천(巖川)에 은거하며 호(號)를 암 천(巖川)이라 하다.
그 후 자손이 세거(世居)하므로 노성파(魯城派)라 호칭(呼稱)하게 된 것이다.
이곳이 지금의 충남(忠南) 논산군(論山郡) 상월면(上月面) 학당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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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공께서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폐위(廢位)와 세조(世祖)의 찬 탈과 외조(外祖) 성삼문선생의 참화(慘禍)를 통탄하고 벼슬에 뜻이 없어 암천연못에서 낚시와 풍월(風月)로 울분한 마음을 달래면서 일생을 마치었다. 그 당시 아우 정간공(貞簡公) 휘 호께서 호서관찰사로 재직시 형님을 찾아 뵈옵고 찬수를 올리니 공께서 말씀하기를 이 물건을 받는 것은 의롭지 않다하고 물리치면서 이후로는 나를 찾지 말아 달라 하였다. 이 모든 사적(史績)이 암천실기(巖川實記)에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암천 연못암벽(岩壁)에 후생(後生) 승지(承旨) 경암 윤동수(敬底 尹東株) 선생이 쓴 암천처사조대(巖川處士約臺)라는 여섯 자를 대서특필로 각(刻)한 유적(遺績)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고 자락헌 판서 유최기 선생이 조대기를 찬하였다.
노성파 파조(派祖) 임경(臨卿)의 관(官)은 숙천부사(粛川府使)로 부터 여러고을을 두루걸처 황주목사를 지내셨다. 돌아가신 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셨다. 선고(先考) 평강공 이(頤)공의 차자(次子)이며 고조부는 조선개국공신 판서 의룡(義龍)이시며 형조참판 강(綱)이 증조부시고 조부 형(亨)은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이시다.
배위(配位) 연안이씨부인이 아들 하나를 낳고 조몰(早歿)하셨다.
계배위(繼配位) 창녕성씨부인은 매죽헌 사육신 성삼문의 따님이며 세 아들을 두었다.
단종복위 사건(1456년)으로 성씨가문이 멸문되자 차녀 성씨부인이 신주(神主)를 시댁에 봉안 하였다.
1672년(숙종) 4월 인왕산의 무너진 벼랑 돌 무더기 사이에서 도자기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세 사람의 신주가 들어있었는데 성삼문과 그의 외손 호조판서 박호(朴壕) 부부(夫婦)의 것이었다. 이 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간 관리와 유생들이 성삼문(무술생) 일곱자가 박힌 신주에 숙연한 심신으로 예를 올렸다.(註 :成謹甫集)
외손주 박호와 함께 인왕산 기슭에 그 존재감을 드러낸 1418년생 성삼문은 죽은지 216년이 흘렀지만 난신(亂臣)으로 이름을 떼지 못한 아직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삼문의 신주는 그가 태어난 홍주(지금의 홍성) 노은동의 옛 집에 봉안되였다.
한양에서 홍주까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신 발인 행렬이 지나는 골목마다 옛 충신을 기리는 마음들이 모여들었다. 세조가 성삼문을 일러 “ 지금은 난신이지만 후세에 충신이 될것 ” 이라 한 말이 사실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왕산 신주사건이 있은 후 19년이 지나 숙종 17년(1691년) 성삼문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복권이 이루어 졌다.
성삼문의 신주(神主)는 무안박씨 임경과 결혼한 차녀 성씨부인에게 맡겨졌다. 한양에 살던 외손 장자(長子) 증(増 1461~4517)이 부모가 돌아가신 후 외조부의 옛 고향 충청도 노성현(魯城縣)에 낙향하였으니 노성파(魯城派)의 입향조가 되신다 그의 평생을 은거하면서 외조부의 절의를 추모하니 사람들의 존숭을 받았다.
차자(次子) 박호(朴壕1466~1533)는 한양의 경저(京邸)에 살면서 과거급제하고 벼슬이 호조판서(중종왕조)에 이르렀다. 형님의 뜻에 따라 외조부 성삼문의 신주를 모시고 차자가 맡아 제사지냈다. 하지만 외손 박호 또한 후손이 끊어져 성삼문의 친손도 외손도 모두 적손(嫡孫)은 적멸(寂滅)했다.
노성의 자손록은 큰아들 암천공 증의 후손으로 계세(系世)하고 있다.
29세손 대종회 종사연구위원장 희문 序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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