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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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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파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였다. 고려왕조에 신하들은 나라를 잃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거나 두문불출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부름받은 무안박씨 풍정공 의룡(義龍 10世손)은 병조판서 고위 관직에 제수를 받아 조선의 도성 한성에 터전을 잡았다. 3대를 내려와 증손(曾孫)이 五로 자손이 번성하여 큰 가문이 되었다. 그 후손들이 각기 분가하여 연고가 있는 향촌에 내려가 문호를 이루게 된다 . 또한 조선 개국을 반대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신 무안박씨 후손들도 가문을 세우니 총 22개 派 로 분파하였다.

경파(京派) 파조(派祖)14세손 진경(晉卿)이시다. 고조 할아버지는 조선 개국원훈공신이며 병조 판서를 지내신 의룡(義龍)이시고 증조부는 형조참판 강(綱)이며, 조부는 단양군수 형(亨)이시고 아버지는 평강 현감 이(頤1393~1478)공 이시다.

공께서는 세종 정사년(1437)에 한성부 지금의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성종왕 때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여 연산군. 중종 삼대를 섬기며 온양 군수 양천 군수. 금부도사 사헌부 감찰. 형조 정랑을 지내셨다. 선대(先代)에서 한성 서촌 정동에 터전을 잡은 후 후대 자손들이 18세기 중반 영조왕조(1750년) 까지 3 백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조정에 많은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며 세가(世家)를 이루었다. 지금의 세거지는 주로 남양, 양주, 경기 광주 이천 아산 등 서울 근교에서 향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 조선왕조에서 빛을 낸 경파 선조들

▲진경晉卿(14世손 성종왕조) 온양군수. 사헌부 감찰,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정랑 ▲언 (15세 중종) 장례원 사의 ▲감​ (15세 중종) 어모장군 오위부장 마량진 첨절제사 ▲​인봉仁鳳(16세 선조) 통정대부 순천 부사 ▲​인학仁鶴(16세 선조) 어모장군 도총부 경력 ​인용仁龍(16세 선조) 서산군수. 임진난때 이순신장군 휘하장군 ▲인(17세 선조) 임진왜란 호종공신 개성 도유사 ​상瑺( 17세 인조) 이괄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무령군(務寧君)에 봉군(封君) 되었고 군 최고 사령부 총수인 도총관과 정헌대부 형조판서. 五도 병마사를 역임하셨다. 珹(17세 선조) 통정대부 인동(仁同) 부사 ▲瑛(17세 인조) 인조반정 원종공신 통정대부 장단 부사 ​초정草亭 응선應善(18세 인조) 유학자로 호조 정랑 형조 정랑 단양 군수를 하셨다. 족보가 없던시절 무안박씨 족보를 만들기 위한 수단을 수거하여 가장보를 만들었다 이 가장보가 후일 최초의 무안박씨 족보 신묘보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호선好善(18세 인조) 절충장군 첨지충추부사 ▲​태규泰圭(20세 숙종) 통정대부 내금위장 여주목사 경상좌수사 ▲​진규震圭(20세 숙종) 가선대부 구성 도호부사이시다 ​서규瑞圭(20세 숙종) 통정대부 삼수 부사 중규重圭(20세 숙종) 통훈대부 이성 현감 이다 .

​정涏(21세손 숙종)알성급제 갑과로 출사하여 홍문록에 올라 40년 숙종 임금을 섬긴 엘리트 관료이다. 홍문관에서 응교 교리 제학으로 임금의 자문을 하셨으며 사간원 대간 의정부 사인 암행어사 이조 전랑 지제교 승지 등 두루 정사에 종사하였다 당파 싸움이 심하던 때에 중용을 지키며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특히 ※ 무안박씨 신묘보 필사본을 만드시고 서문(序文)을 쓰신 무안박씨 족보의 지대한 공로자이시다. ▲​징澄(21세 숙종) 가선대부 이조참의 한성부 우윤 신묘보를 처음 만들 때 물심 양면으로 후원한 지대한 공로자이다. ​횡鐄 (21세 숙종) 가의대부 동지의금부사 겸 도총부 부총관 ​건鍵(21세 숙종) 통정대부 평해 군수 ​ 선 銑(21세 영조)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재해載海(22세 영조) 통정대부 평산부사​재한載漢(22세) 통정대부 박천 군수​재수載洙(22세 영조) 통정대부 봉산군수 사헌부 감찰 형조 정랑 ▲​재하載河(22세 영조) 전라좌수사 영조31년(1755년)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어 일어난 당쟁이 ​을해(乙亥)옥사이다. 나주(羅州)에서 나라를 비방하는 괴서로 역모사건으로 번져 주모자와 소론 인사들이 사형 또는 귀양 가고 소론 세력이 크게 몰락한다. 당시 전라좌수사도 연관되었다 의심을 받아 제주도에 억울한 귀양 살이 하였다. 5년 후에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 복권되어 충청도 수사(水使)에 복직되었다. ​재연載淵(22세) 통정대부 장흥 군수이다. 이상은 조선 6대왕 성종왕 시대에 경파(京派)로 분가하여 가문을 세운 후 ~ 21대 영조 까지 관직에 봉직한 열조이시다.

 

영조의 뒤를 이은 손자 정조가 등극하여 남인의 채재공을 영의정으로 실학파 정약용 박제가 등 성리학자를 기용 하여 정치 문화 사회를 개혁하였다. 불행하게도 개혁군주 정조가 갑짝스런 죽음으로 개혁정치는 좌절되었다. 어린 왕자 11살 순조의 수렴청정은 할머니 정순왕후가 되어 노론의 벽파 정권은 개혁파를 숙청하고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는다 하여 귀양보내고 천주교도 수천명을 신유박해로 죽이었다. 이어서 외척 안동김씨가 집권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 헌종 두 왕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어 매관 매직, 부정부패, 백성의 생활고, 홍경래 민란 등 나라가 혼돈의 늪에 빠진다. 소망의 유생과 선비는 갈 길이 막히었다.

조선 후기 경파​는 남인(南人)당에 속하였다.▲ 경기도 광주로 낙향 한 유생 聾啞(농아) 사정(思正 )​은 과거 시험은 접어야 했다. 과거를 폐하고 서원에서 학문에만 열심 하였다. 동문 수학 한 남인 출신 순암 안정복이 동사강목(고조선~고려말까지 역사서)을 저술하여 역사학자로 실학자로 학계에 존경받고 있다. 농와 사정도 수 권의 책과 특히 보학(譜學)에 능통하여 성씨(姓氏) 보첩을 연구하여 백씨보략(百氏譜略)을 저술하였다. 무안박씨가 1754년 갑술보를 발간할 때 그의 나이 43살 그의 손으로 편집과 교정을 하였다고 한다. 갑술보 머리글 일러두기에 기록하기를, 고려 때 조상은 오래되어 상세히 쓸 수 없으니 후일 새로운 증거(정보)​를 얻으면 바르게 고쳐 쓰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조전랑 박정(吏曹銓郎 朴涏) 조선붕당정치(朋黨政治)

이조전랑은 관리들의 인사(人事)를 관리하는 이조(吏曹)의 중요한 직책이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된 이후 선조 임금님(임진왜란)이 즉위 후 정권 장악을 위하여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이조전랑 직을 놓고 크게 대립했다. 강경파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고 온건파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각각 동인(東人)인당(西人)으로 부르게 되었다.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사색당파가 된 것이다.

무안박씨 신묘보(1711년)를 창보하신 21세손 朴涏(박정)공이 암행어사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직에 계시다가 숙종18년 1692년 12월에 관리들의 대망이며 관직의 꽃이라 부르는 이조전랑(吏曹銓郎) 중책에 제수(除授)되었다. 숙종 임금이 남인(南人)으로 정권을 바꿔 환국정치를 한 것이다. 이조실록에 기록하기를 공께서는 인사관리를 얼마나 엄격하게 심사하였는지 온정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조실록 기록에는 1686년 숙종12년 대과를 알리는 방을 붙이니 그 날 4월3일에 알성시(謁聖試) 시험장에 전국 고을에 유생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과장에 먼저 들어가려고 질서 없이 혼잡하여 담장이 무너지고 많은 사상자를 내어 8명이나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험을 연기하여 이틀 뒤 4월5일 과장을 옮겨 창덕궁 후원(비원) 춘당대 에서 그 많이 모인 시험자 중에서 9명 만이 급제하였다. 조식(趙湜)이 장원이고 2위가 박정(朴涏)​이다. 관직의 등용문인 대과 시험을 위하여 유생들은 일생을 공부하지만 그중에 고작 한 자리 수 9명만이 발탁 되었다 하니 대과 시험을 하늘의 별 따기 시험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공(公)은 숙종 경종 영조 세 임금을 모시고 입사한지 40년 만에 영조 원년에 은퇴하시고 그해 1725년 12월23일 한양 본제에서 73세로 고종명 하시니 천수를 다 하셨다.

그러나 공이 돌아가시고 4년 후 영조 6년에 외아들 박지문(趾文)이 불행하게도 무고(誣告)로 역모에 몰려 억울하게 고신(拷訊) 끝에 옥사한다.

박지문(趾文)옥사사건 전말(獄死事件 顚末)

남인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가는 당이다. 영조 다음 정조가 즉위 후 남인의 영수 채재공이 영의정에 오른다. 영조 때 억울하게 죽은 박정의 아들 박지문의 역모사건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영영 묻어버린다고 바로 잡기 알리기 위한 박진사 전을 유집에 올린 글이다.

박진사 전(朴進士 傳) 『영의정 채재공(1720~1799) 지음』

박진사 지문(趾文)의 자는 세능(世能)이니 무안박씨이다 부친 박정(朴涏)은 의정부 사인(舍人) 승정원 승지 제학(提學)으로 홍문관에서 늙었고 선비들의 높은 존경을 독차지 하였다. 공이 부친의 훈육을 잘 받아서 처신이 매우 엄정하였고 한 걸음 한 마디 섣불리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다 귀히 여기었다. 부모에게 극히 효성스럽던지 좀처럼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부친이 혹 실언하는 일이 있으면 조용히 고하기를 『저번 말씀이 고연 사리에 맞습니까?』 하면 부친이 선 듯 깨우쳐 『내가 실언하였다』고 한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여 온갖 경서(經書)를 가슴속에 채웠고 소년시절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후진들에게 모범이었다.

성균관에 들어간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 전념하여 정주자(程朱子)의 심법을 본받으니 좋은 친구들과 교제하였다. 그의 독실한 행의를 듣고 나라에서 침랑(寢郞)을 제수하였는데 마침 영남에 출장 가는 일이 있어 미처 듣지 못하여 기한이 지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때 경술년(영조6 1730년) 역모사건이 일어나 그 역적을 체포하니 이름이 박사공(朴思恭)인지라 그는 박씨 집안의 동생뻘 되는 박사효(朴思孝)의 얼제라(종첩에서 낳은 서자)인데 불평불만이 많고 그의 행동이 요사한 자라 공이 그의 행위를 보고 크게 꾸지람을 한 일이 있는데 이에 그가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역모가 탄로 나자 공이 역모에 가담한 것처럼 끌여들여 거짓으로 고변하니 마참내 박진사가 억울하게 체포되었다.

임금이 친히 국문할 때 역모를 모의한 자가 말하기를 “박진사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도 사은하지 않고 불충을 저질렀다”며 지난 영남 출장 시 받지 못한 침랑 제수 사건을 물고 들어가 그 일로 호되게 고문을 당하니 국문 중에 사망하였다. 국문 중에 호되게 쳐서 피가 흥건히 흐르니 혼몽 중에도 흐르는 피를 말끔히 핥는다 형리가 기이히 여겨 물으니 “ 이것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다 어찌 흘려버리랴” 고 대답하니 형장이 숙연해졌다. 뒤에 사위가 되는 목조영(睦祖永)의 여식 즉 외손녀가 외조부 박진사의 무고(誣告)함을 탄원하므로 재조사되고 억울함이 밝혀지므로 영조 임금께서 직첩을 내려 신원(伸冤)해 주시고 복권하여 주셨다.

29세손 희문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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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보(家藏譜) 창안하신 초정(草亭) 선생 응선(​應善)

초정선생 응선(應善18세손) 임진왜란의 참상을 겪은 세대이다. 아버지 인(璘)공은 임난 때 선조왕의 피난을 도운 호종공신(扈傱功臣) 개성 도사 이다.

조선 14대 선조왕이 즉위 하면서 서인(西인)과 동인(東人)의 당쟁이 심화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노할 징후가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임박하였음에도 대비치 못하여 임진왜란 20여일 만에 도성이 무너졌다. 왕은 궁궐을 버리고 명나라로 피난길에 올랐으니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게 한 무능한 임금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왜란 직전에는 서인(西人)이 동인(東人) 의 정여립을 역모로 고변하여 임금이 친히 국문한 기축옥사는 동인(東人)의 유력 인물과 관직자, 유생들이 연루되었다 하여 무려 1000여명이 떼 죽음을 당하는 당쟁이 극한에 달하였다. 천인공노 할 옥사로 인하여 모반 정여립의 고향인 전라도 선비들의 피해가 컸던 연유로 지역 민심까지 동요되는 혼돈의 시대였다.

 

이를 지켜보고 성장한 초정선생은 혼탁한 정국에 물들지 않겠다는 의지로 은둔 길을 택하고 광주 섬강에 초옥을 짓고 학업에 전력하여 기호(畿湖)지방의 유림으부터 훌륭한 이름이 드러났다. 경기 광주지역은 지금의 강남 강동 하남 남양주에 걸친 넓은 지역으로 기호남인(畿湖南人)이 태동한 지역이다.

인조 반정 후에 인조왕께서 은둔한 현량지사를 찾아 관직에 등용하라 하니 이조(吏曹)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가 단양군수, 사간원 언관, 형조정랑에 두루 등용되었다.

공이 은둔하여 학업에 진력하실 때 지방의 유림들과 넓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무안박씨의 족보가 없음을 한탄하여 족보를 만들어야 할 일념으로 유림들과 통문하여 지방의 무안박씨 문중으로부터 수단을 수거하여 족보를 창제하신 것이 최초의 무안박씨 족보이며 가장보(家藏譜)라 이름하였다.

공께서 남기신 유집중에 사정헌기(四淨軒記) 산과 물과 거문고의 깨끗함을 읊은 시가서(詩歌書)을 소개한다 . 과거시험에는 시경(詩經 중국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시가집)이 필수과목이다. 선비라면 시가에 능하여 시로 의사를 주고 받으며 교제한다.

 

사정절헌구(四淨節 軒句)

詠山(영산)

山輿幽人素 산이 사람을 안고 개끗하니

自然無垕氣 자연은 한 점 티끌 없네

峰載千秋雪 봉우리에는 천추의 눈이 덮였고

嚴棲萬古雲 바위에는 만고의 구름이 어려 있네

詠水(영수)

登江明知鏡 거울같이 해맑은 강물에

相對瑩心江 나의 마음과 간장을 비추네

幸無洗耳客 행여 귀를 씻는 손객이 없거든

何物汚淸瀾 누구랴 맑은 물을 더럽히랴

 

詠琴(영금)

依壁桐三尺 벽에 걸린 거문고를 퉁기니

輕塵不上絃 잡념이 다 사라지네

流水高山意 유수와 고산의 곡조가

無聲別有傳 소리없이 오래 전하리


초정선생이 무안박씨 족보를 기초(基礎)를 놓고 그 위에 후손 증손자 의정부 사인공 정(涏) 울산 부사공 징(澄) 종형제가 증조부께서 기초한 족보를 증보(增譜)완성 하기로 합심하였으며 동생 진사(進士) 호(浩)공의 묵필(墨筆)로 1711년 신묘보(辛卯譜) 필사본을 만들었다. 재정상 간행을 못하다가 1754년 간행할 제 갑술보(甲戌譜) 네 권의 책으로 중수(重修) 편찬하였다. 갑술보의 편집은 보학을 공부하여 백씨보략(百氏譜略)책을 낸 농아(聾啞) 박사정 선생이 감수하였다. 족보 책머리에 일러두기를 족보를 숙고하건데 고려시대 조상은 오래되어 상세히 알지 못한다. 의심되는 것은 년수(年數)는 많고 세수(世數)가 적다 지적하였다. 후일 고증하여 고치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조 진승이 성종 때 수관(受貫) 받았으면 서기981~997년이고 고려가 1392년 망하였으면 년수가 약4백년인데 무안박씨 세수(世數)는 10세에 불과하니 조상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하였다.

무안군부인박씨 묘지명(務安郡夫人朴氏墓誌銘)

(고려 충렬왕 때(13세기) 인물이며 무안인의 최초 묘지명)

부인의 성은 박씨이고 가계는 무안에서 나왔다.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장군 박부(朴琈)의 셋째 딸이며 광정대부 도첨의시랑 찬성사로 추봉되고 행 봉익대부 판도판서 문한시학으로 치사하신 최서(崔瑞) 배필이다. 할아버지는 조산대부 병부시랑 금오위 섭장군 박성기(朴成器) 증조할아버지는 통의대부좌우위대장군 지병부사 박유(朴蕤)이다 어머님은 선(蘚)씨는 협계군부인(俠溪郡夫人)으로 봉해졌고 외할아버지는 조정대부 금오위대장군 박대유이다. 부인은 23세에 최공에게 시집갔는데 공은 문헌공 최충의 현손이다 모두 4남2녀를 낳았다 (중간 생략) 향년 70세 무오년(1318년)에 고종명하셨다. 이하 생략

묘지명 박씨부인은 6세 밀직부사 부(琈) 의 딸이다. 7세 면성군 문오(文晤)과 남매간이다.

묘지명으로 확인된 7세 면성군의 가계도

고조부 윤위(족보3세)명종1170년→ 증조부 유(족보4세) 강종1213년 →조부 성기(족보5세) 고종1240년 →부친 琈(족보5세)원종 1274년 →문오. 문연. 딸(족보7세) 충렬왕 1300년

족보의 2세 섬(暹)공이 ​고려사 현종인물열전에 현종왕조(1009~1031년)의 인물로 고증 되었고 아들이 윤위 라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발굴한 묘지명을 해석하여 년대를 계산하니 족보와는 다르게 2세 섬 3세 즉 아버지와 아들 간의 년대 차이가 100 여년 차이가 난다. 년차로 보아 2세~3세 사이에 조상을 3대는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족보의 기록이 오류임을 묘지명으로 인하여 알게 되었다. 2025년 이번에 발간한 갑진보에는(전자족보) 3대를 공란으로 비워 두기로 개정하였다. 최초로 만든 족보 갑술보(甲戌譜)에 역사에 비해 세수(世數)가 부족하니 후일 밝혀 고치라 당부한 것도 다 해소되었다.

29세손 희 문 序

 

 

                                       

                                       

                                                                                                                    경파 선조묘 비석 모음

 

진무공신 무령군 형조판서 박 상(朴 瑺1582~1634년) 초상화

진무공신 무령군 형조판서 박 상(朴瑺 1582~1634년) 초상화는 이 괄의 난을 평정하고 진무공신 2등에 등록된 후 진무공신(功臣) 도상(圖像)을 화원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낮고 뿔이 넓으며 둥근 오사모(烏紗帽)에 구름 무늬가 그려진 흑녹색의 단령(깃을 둥글게만든) 정장 관복을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체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자상(全身交椅子像)으로 초상화의 바탕은 견본(絹本)위에 그려져 있다. 화려한 채색을 한 채전(彩氈)의 문양과 족좌대 위에 놓인 가죽 신이며 공수자세를 취한 양손 사이로 흰 창의 소매가 보이고 단령의 트임 사이로 내 비치는 안감 및 첩리는 형식상 17세기 초중기의 특징이다.

학정금대(鶴頂金帶)를 두르고 흉배무늬는 해태상과 주위에 모란이 장식되어 있다 . 안면기법은 살색을 기조로 하여 안모의 외곽및 이목구비 부분을 약간 짙은 갈색의 선으로만 처리리하고 음영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있다. ( 문화재청 설명서)


진무공신 무령군 형조판서 17세손 박 상(朴 瑺1582~1634년)

박 상 은 남양부(南陽府:현 화성시 송산면 독지리) 출신으로 자는 중헌(仲獻) 본관은 무안으로 1600년(선조28) 불과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주 판관 철산 군수 훈련원 도정을거쳐 광해군 때에 일찍이 길주목사에 올랐다.

『 조선왕조 실록에는 인조반정후 공신록 책봉에 불만을 품은 평안도 병마사 이괄이 난(1624년인조2) 을 일으켜 도성이 무너지고 임금이 급히 공주로 몽진하는 등 관군이 반군에 밀려 사직이 위급할때에 별장(別將) 박 상 이 소수의 정예군 800을 이끌고 반란군을 소탕하여 나라를 위난에서 수복하고 임금을 환궁케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공으로 진무공신 2등에 등록되어 정헌대부 무령군(務寧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충청 전라 경상좌.우도 함경도등 五도 병마사 를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상 병마사 때에는 염초(화약)굽는 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염초를 비축 하였다고 이조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군의 최고 사령관인 오위도총관을 두번(인조5년 9년)식이나 제수 받아 군령을 바로 세우고 임금을 보위하였다고 한다. 인조6년(1628년)에는 정헌대부 형조판서에 올랐다. 1634년(인조12) 북도 병마사로 계실 때 급서하시니 인조 임금께서 친히 어명을 내려 시신을 운구하여 후히 장사하라 하시니 양주 진평리 선산에 안장하였다.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시었다. 애석하다 공의 나이 52세이다.

29세손 희문 序


 


 

                                                                                                           무안박씨 경파 사적비


                                    경파 파조  온양공 진경(晉卿)14世 묘소 (남양 화성 남양)


       초정 응선선생 단양군수 18世 외 28位선조 납골묘 (경기 광주)

 

                            진무공신 무령군 형조판서 상(瑺) 17世 묘소 (남양주 진접읍)

 

                                                                                                                                          
 

 

                                               평강공(頥13세) 숭모재

 

향사일정

평강공 시제 매년 (음)10월 1일   

온양공(진경) 매년 (음) 10월 첫째 일요일

무령군 (박상) 매년 (음) 10월 첫째 토요일

                      파조 온양공 (진경 14세) 시제

 

​무안박씨 분파의 유래 를 알려면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성씨를 불렀으며 본관을 가진 씨족 공동체(문중) 갖게 되었나 탐구해야 한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는 중국과 달리 백성이 성을 쓰지 않았다. 삼국 시대에는 임금은 박씨 김씨 성이 있으나 이름 앞에 벼슬를 불렀다. 백성은 성이 없이 어디 사는 누구라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 태조 왕건이 중국과 같이 성씨를 가지라고 하였다. 백성이 처음으로 성명(姓名성씨와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또 성명 앞에 본관(本貫)을 앞에 붙여 같은 박씨라도 구별하여 부르게 함으로 본관이 같은 혈족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를 문중(門中)이라 부른다. 본관과 성씨는 임금이 내리는 것이라 하여 사성(賜姓) 또는 수관(受貫)이라 한다. 나라에서 누구에게 본관을 내려주는 대상은 나라의 벼슬하는 고위 관직자나 지역에서 권세 있는 호장(豪長) 에게 주었다.

​본관을 무안 으로 성을 박씨로 나라에서 하사 받아 무안박씨의 시조가 된 사람은 누구인가? 고려 성종왕조 때 국자감 좨주(祭酒) 벼슬에 오르고 거란 침입시에는 고주성(지금의 함경도 원산 고원군) 방어사 진승(進昇)이다. 그는 유학자로서 국가가 위급할 때 선봉장으로 적을 물리친 공로로 무안박씨 무안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자손들이 고려에서 4백년 조선의 5백년 천년여의 역사를 내려오면서 지금은 인구가 약 10 만명이 되었다. 이들이 분가 하여 각자 족보(보첩)를 기록하고 있는 문중이 22개 종파(宗派)가 된다. ​ 대종회(大宗會)에서는 대게 14세(世)손에서 분가 한 것으로 종파별(宗派別)로 대동보(大同譜)에 등재하고 있다.


종파의 세거지는 팔도에 널리 퍼져 산거하고 있으며 관향(貫鄕)인 무안,경상도 영해 봉화. 땅끝마을 .해남 충청 노성. 인구가 많은 종파에 속하며 그 외 살기 좋은 고을에 정착하여 향촌을 형성하고 있다. 그 향촌 이름에 따라 무안파 영해파 해남파 노성파 ○..등등 향촌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나의 종중 경파는 조선을 개국하여 처음 자리 잡은 도성 문안 지금의 정동 새문안에서 오래 살아서 경파(京派)라 부른다.

 

▼ 대종회 에서는 각 종파를 결속하고 조상을 추념하는 향사(享祀)와 족보가 1,5세대가 지나면 대동보를 발간하여 세보를 관리하여 왔는데 시대가 변하여 종이 족보 시대는 지나가고 디지털 전자족보 시대가 열렸다. 노인 세대는 불편하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인터넷이 생활화 되어 효룰적인 관리가 기대됩니다.

자주 물어보는 문답

○ 박씨 중에 무안박씨와 본관이 다른 박씨들이 백여개가 넘는데 혈통이 같습니까 ? 답 : 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그들이 분가하여 가문을 형성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본관을 받아 본관이 같은 씨족공동체(종중)가 족보를 만들어 가지고 있다. 백여개가 된다고 하지만 밀양, 함양,반남,순천, 무안박씨가 순위 5위로 큰 종중이며 나머지는 소수파로 분파되어 있다. 조선 5백년 역사동안 성씨도 많은 변화가 있어 갑오경장 때 성이 없던 천민(종)을 해방하며 성씨를 만들어 주었다. 박씨라 하여도 족보에 올릴 수 없는 인구도 있을 것이다.

○ 무안박씨 시조는 신라박씨의 몇 대손 ?

답 : 신라시대는 백성이 성을 족보를 쓰지 않아 계보를 모르는 시대였다. 고려 말기에 족보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천년의 계보를 따지는 것 불가능 합니다.

지금 항간에 범 박씨 신라박씨선원보라 하여 밀양박씨에서 만든 것이 있는데, 사람의 한세대 가 30년 천년이면 모두 30세가 된다고 계산했다. 고려 때 수관 받은 년도를 기준하여 자기가 몇 세인지 만일 29세이면 신라 30세에 자기 몇 대손을 더하면 박혁거세 몇 대손이라 계산하고 있다, 우리 무안박씨는 3대를 실전하여 이 공식에 맞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증된 실제가 아니고 한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한 가상입니다. 참고하여 적용하셔야 합니다.

○ 우리 무안박씨 시조(관조) 진승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답 : 부모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도, 무안박씨의 시조 진승도 부모가 있겠지요. 그러나 박혁거세신라를 건국하여 시조가 되었고, 진승고려시대 무안 시조​로 사성(賜姓)받아 무안박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족보는 시조의 자손을 기록하는 것이라 상계 上系의 기록이 없습니다.

29세손 희문 序

 

삼국 시대는 왕족 외에는 일반 백성은 성을 쓰지 않아 동족 간의 촌수를 알 수 없지만

고려의 왕건은 나라의 백성들에게 본관과 성명을 가지게 하여 개인의 신분이 존중되었다. 동족 간의 멀고 가까운 친족을 분별하는 계보(系譜)를 기록하여 가문의 족보를 기록하였다. 국가의 공훈이나 고위 관직자를 고려사(高麗史)의 인물 열전에 출신 지역과 본관. 성명. 생졸 년과 행적을 기록하였다.

2025년 갑진보 1권 문헌록 다음 목차(目次)에 상계(上系)조상에 대하여 시조 1세부터 12세까지 행장(行狀)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상계 조상에 대하여는 분파 세보(世譜)에 기록되어 있다

경파는 조선시대에서 많은 관직자를 냈다. 현감이상 내외(內外) 관직자가 35명이며 그 중 정이품 판서 1명. 종이품 참판 4명. 정三품 당상관 20명 기타 현감 9명이다. 명단은 앞서 경파 역사 그 행적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나라에서 명예로 주는 증직(贈職)이 아닌 실직(實職)만 파악한 것이다.)

당상관 이상이면 임금이 참석하는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자격이 부여된다. 또 어전 회의에서 부당한 것은 「아니 되옵니다」 발언할 수 있어 정사에 영향을 주는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회의에서 중요한 발언내용이 이조실록에 등재되는 것이다.

 

무안박씨의 족보를 만드는데 초정 선생 응선(18世) 공이 첫걸음을 떼었고 3대를 걸쳐 증손자 사인공 정(涏21세) 공이 마침을 하였으니 처음족보 신묘보(1711년) 이다. 길이 기억할 선조이다. 그는 남인(南人黨) 출신 사인공 정(涏)은 숙종 임금께서 얼마나 아끼시었는지 공을 육조(六曹)의 판서로 내보내지 않고 홍문관 제학승정원 승지로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늙게하였다. 육조의 판정승 벼슬은 당파 싸움의 희생 이 될 가 염려하여 서다.

숙종 임금이 탕평정책으로 정권을 바꾸는 환국정치를 하였다. 노론당의 영수 송시열이 남인당에 가까운 장희빈의 아들 세자 책봉에 반대하다 기사환국 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서울로 압송 도중 정읍 에서 사사(賜死)하는 불행을 기억 하고 있다. 사인공 정(涏)은 임금의 배려로 다행이 관직 40년 숙종과 함께하며 생애의 마감도 거의 같이 하셨다.

 

평강공 선산 에 손자 감(堪경파15세) 부장공의 무덤이 있다. 한 가문을 세운 장한 어머니 배(配) 전주이씨 부인 조비(祖妣)와 합폄(合窆)한 선영이다. 초취가 조몰(早歿)하여  재취로 시집 와 남편과는 나이 차로 부군이 먼저 어린 자식 셋을 두고 돌아가셨다. 젊은 과수가 논 밭 농지가 척촌도 없으니 생계가 막막하다. 서울 집을 정리하여 선산 밑에 농지를 마련하여 농사 지으며 아들 셋을 훌륭히 키워 큰 아들 인봉은 순천부사 둘째 아들 인학은 어모장군 도총부 경력 셋째는 인용은 서산군수 임진난 때는 이순신 수하에 장군으로 참전하여 나라를 지켰다. 손자 대에서는 상(瑺)은 무령군 형조판서이며 영(瑛)은 장단부사 성(珹)은 인동부사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경파의 대종을 이룬 것이다. 

    29세손  희문      序

 

경파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였다. 고려왕조에 신하들은 나라를 잃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거나 두문불출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부름받은 무안박씨 풍정공 의룡(義龍 10世손)은 병조판서 고위 관직에 제수를 받아 조선의 도성 한성에 터전을 잡았다. 3대를 내려와 증손(曾孫)이 五로 자손이 번성하여 큰 가문이 되었다. 그 후손들이 각기 분가하여 연고가 있는 향촌에 내려가 문호를 이루게 된다 . 또한 조선 개국을 반대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신 무안박씨 후손들도 가문을 세우니 총 22개 派 로 분파하였다.

경파(京派) 파조(派祖)14세손 진경(晉卿)이시다. 고조 할아버지는 조선 개국원훈공신이며 병조 판서를 지내신 의룡(義龍)이시고 증조부는 형조참판 강(綱)이며, 조부는 단양군수 형(亨)이시고 아버지는 평강 현감 이(頤1393~1478)공 이시다.

공께서는 세종 정사년(1437)에 한성부 지금의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성종왕 때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여 연산군. 중종 삼대를 섬기며 온양 군수 양천 군수. 금부도사 사헌부 감찰. 형조 정랑을 지내셨다. 선대(先代)에서 한성 서촌 정동에 터전을 잡은 후 후대 자손들이 18세기 중반 영조왕조(1750년) 까지 3 백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조정에 많은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며 세가(世家)를 이루었다. 지금의 세거지는 주로 남양, 양주, 경기 광주 이천 아산 등 서울 근교에서 향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 조선왕조에서 빛을 낸 경파 선조들

▲진경晉卿(14世손 성종왕조) 온양군수. 사헌부 감찰,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정랑 ▲언 (15세 중종) 장례원 사의 ▲감​ (15세 중종) 어모장군 오위부장 마량진 첨절제사 ▲​인봉仁鳳(16세 선조) 통정대부 순천 부사 ▲​인학仁鶴(16세 선조) 어모장군 도총부 경력 ​인용仁龍(16세 선조) 서산군수. 임진난때 이순신장군 휘하장군 ▲인(17세 선조) 임진왜란 호종공신 개성 도유사 ​상瑺( 17세 인조) 이괄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무령군(務寧君)에 봉군(封君) 되었고 군 최고 사령부 총수인 도총관과 정헌대부 형조판서. 五도 병마사를 역임하셨다. 珹(17세 선조) 통정대부 인동(仁同) 부사 ▲瑛(17세 인조) 인조반정 원종공신 통정대부 장단 부사 ​초정草亭 응선應善(18세 인조) 유학자로 호조 정랑 형조 정랑 단양 군수를 하셨다. 족보가 없던시절 무안박씨 족보를 만들기 위한 수단을 수거하여 가장보를 만들었다 이 가장보가 후일 최초의 무안박씨 족보 신묘보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호선好善(18세 인조) 절충장군 첨지충추부사 ▲​태규泰圭(20세 숙종) 통정대부 내금위장 여주목사 경상좌수사 ▲​진규震圭(20세 숙종) 가선대부 구성 도호부사이시다 ​서규瑞圭(20세 숙종) 통정대부 삼수 부사 중규重圭(20세 숙종) 통훈대부 이성 현감 이다 .

​정涏(21세손 숙종)알성급제 갑과로 출사하여 홍문록에 올라 40년 숙종 임금을 섬긴 엘리트 관료이다. 홍문관에서 응교 교리 제학으로 임금의 자문을 하셨으며 사간원 대간 의정부 사인 암행어사 이조 전랑 지제교 승지 등 두루 정사에 종사하였다 당파 싸움이 심하던 때에 중용을 지키며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특히 ※ 무안박씨 신묘보 필사본을 만드시고 서문(序文)을 쓰신 무안박씨 족보의 지대한 공로자이시다. ▲​징澄(21세 숙종) 가선대부 이조참의 한성부 우윤 신묘보를 처음 만들 때 물심 양면으로 후원한 지대한 공로자이다. ​횡鐄 (21세 숙종) 가의대부 동지의금부사 겸 도총부 부총관 ​건鍵(21세 숙종) 통정대부 평해 군수 ​ 선 銑(21세 영조)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재해載海(22세 영조) 통정대부 평산부사​재한載漢(22세) 통정대부 박천 군수​재수載洙(22세 영조) 통정대부 봉산군수 사헌부 감찰 형조 정랑 ▲​재하載河(22세 영조) 전라좌수사 영조31년(1755년)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어 일어난 당쟁이 ​을해(乙亥)옥사이다. 나주(羅州)에서 나라를 비방하는 괴서로 역모사건으로 번져 주모자와 소론 인사들이 사형 또는 귀양 가고 소론 세력이 크게 몰락한다. 당시 전라좌수사도 연관되었다 의심을 받아 제주도에 억울한 귀양 살이 하였다. 5년 후에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 복권되어 충청도 수사(水使)에 복직되었다. ​재연載淵(22세) 통정대부 장흥 군수이다. 이상은 조선 6대왕 성종왕 시대에 경파(京派)로 분가하여 가문을 세운 후 ~ 21대 영조 까지 관직에 봉직한 열조이시다.

 

영조의 뒤를 이은 손자 정조가 등극하여 남인의 채재공을 영의정으로 실학파 정약용 박제가 등 성리학자를 기용 하여 정치 문화 사회를 개혁하였다. 불행하게도 개혁군주 정조가 갑짝스런 죽음으로 개혁정치는 좌절되었다. 어린 왕자 11살 순조의 수렴청정은 할머니 정순왕후가 되어 노론의 벽파 정권은 개혁파를 숙청하고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는다 하여 귀양보내고 천주교도 수천명을 신유박해로 죽이었다. 이어서 외척 안동김씨가 집권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 헌종 두 왕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어 매관 매직, 부정부패, 백성의 생활고, 홍경래 민란 등 나라가 혼돈의 늪에 빠진다. 소망의 유생과 선비는 갈 길이 막히었다.

조선 후기 경파​는 남인(南人)당에 속하였다.▲ 경기도 광주로 낙향 한 유생 聾啞(농아) 사정(思正 )​은 과거 시험은 접어야 했다. 과거를 폐하고 서원에서 학문에만 열심 하였다. 동문 수학 한 남인 출신 순암 안정복이 동사강목(고조선~고려말까지 역사서)을 저술하여 역사학자로 실학자로 학계에 존경받고 있다. 농와 사정도 수 권의 책과 특히 보학(譜學)에 능통하여 성씨(姓氏) 보첩을 연구하여 백씨보략(百氏譜略)을 저술하였다. 무안박씨가 1754년 갑술보를 발간할 때 그의 나이 43살 그의 손으로 편집과 교정을 하였다고 한다. 갑술보 머리글 일러두기에 기록하기를, 고려 때 조상은 오래되어 상세히 쓸 수 없으니 후일 새로운 증거(정보)​를 얻으면 바르게 고쳐 쓰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조전랑 박정(吏曹銓郎 朴涏) 조선붕당정치(朋黨政治)

이조전랑은 관리들의 인사(人事)를 관리하는 이조(吏曹)의 중요한 직책이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된 이후 선조 임금님(임진왜란)이 즉위 후 정권 장악을 위하여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이조전랑 직을 놓고 크게 대립했다. 강경파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고 온건파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각각 동인(東人)인당(西人)으로 부르게 되었다.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사색당파가 된 것이다.

무안박씨 신묘보(1711년)를 창보하신 21세손 朴涏(박정)공이 암행어사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직에 계시다가 숙종18년 1692년 12월에 관리들의 대망이며 관직의 꽃이라 부르는 이조전랑(吏曹銓郎) 중책에 제수(除授)되었다. 숙종 임금이 남인(南人)으로 정권을 바꿔 환국정치를 한 것이다. 이조실록에 기록하기를 공께서는 인사관리를 얼마나 엄격하게 심사하였는지 온정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조실록 기록에는 1686년 숙종12년 대과를 알리는 방을 붙이니 그 날 4월3일에 알성시(謁聖試) 시험장에 전국 고을에 유생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과장에 먼저 들어가려고 질서 없이 혼잡하여 담장이 무너지고 많은 사상자를 내어 8명이나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험을 연기하여 이틀 뒤 4월5일 과장을 옮겨 창덕궁 후원(비원) 춘당대 에서 그 많이 모인 시험자 중에서 9명 만이 급제하였다. 조식(趙湜)이 장원이고 2위가 박정(朴涏)​이다. 관직의 등용문인 대과 시험을 위하여 유생들은 일생을 공부하지만 그중에 고작 한 자리 수 9명만이 발탁 되었다 하니 대과 시험을 하늘의 별 따기 시험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공(公)은 숙종 경종 영조 세 임금을 모시고 입사한지 40년 만에 영조 원년에 은퇴하시고 그해 1725년 12월23일 한양 본제에서 73세로 고종명 하시니 천수를 다 하셨다.

그러나 공이 돌아가시고 4년 후 영조 6년에 외아들 박지문(趾文)이 불행하게도 무고(誣告)로 역모에 몰려 억울하게 고신(拷訊) 끝에 옥사한다.

박지문(趾文)옥사사건 전말(獄死事件 顚末)

남인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가는 당이다. 영조 다음 정조가 즉위 후 남인의 영수 채재공이 영의정에 오른다. 영조 때 억울하게 죽은 박정의 아들 박지문의 역모사건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영영 묻어버린다고 바로 잡기 알리기 위한 박진사 전을 유집에 올린 글이다.

박진사 전(朴進士 傳) 『영의정 채재공(1720~1799) 지음』

박진사 지문(趾文)의 자는 세능(世能)이니 무안박씨이다 부친 박정(朴涏)은 의정부 사인(舍人) 승정원 승지 제학(提學)으로 홍문관에서 늙었고 선비들의 높은 존경을 독차지 하였다. 공이 부친의 훈육을 잘 받아서 처신이 매우 엄정하였고 한 걸음 한 마디 섣불리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다 귀히 여기었다. 부모에게 극히 효성스럽던지 좀처럼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부친이 혹 실언하는 일이 있으면 조용히 고하기를 『저번 말씀이 고연 사리에 맞습니까?』 하면 부친이 선 듯 깨우쳐 『내가 실언하였다』고 한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여 온갖 경서(經書)를 가슴속에 채웠고 소년시절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후진들에게 모범이었다.

성균관에 들어간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 전념하여 정주자(程朱子)의 심법을 본받으니 좋은 친구들과 교제하였다. 그의 독실한 행의를 듣고 나라에서 침랑(寢郞)을 제수하였는데 마침 영남에 출장 가는 일이 있어 미처 듣지 못하여 기한이 지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때 경술년(영조6 1730년) 역모사건이 일어나 그 역적을 체포하니 이름이 박사공(朴思恭)인지라 그는 박씨 집안의 동생뻘 되는 박사효(朴思孝)의 얼제라(종첩에서 낳은 서자)인데 불평불만이 많고 그의 행동이 요사한 자라 공이 그의 행위를 보고 크게 꾸지람을 한 일이 있는데 이에 그가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역모가 탄로 나자 공이 역모에 가담한 것처럼 끌여들여 거짓으로 고변하니 마참내 박진사가 억울하게 체포되었다.

임금이 친히 국문할 때 역모를 모의한 자가 말하기를 “박진사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도 사은하지 않고 불충을 저질렀다”며 지난 영남 출장 시 받지 못한 침랑 제수 사건을 물고 들어가 그 일로 호되게 고문을 당하니 국문 중에 사망하였다. 국문 중에 호되게 쳐서 피가 흥건히 흐르니 혼몽 중에도 흐르는 피를 말끔히 핥는다 형리가 기이히 여겨 물으니 “ 이것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다 어찌 흘려버리랴” 고 대답하니 형장이 숙연해졌다. 뒤에 사위가 되는 목조영(睦祖永)의 여식 즉 외손녀가 외조부 박진사의 무고(誣告)함을 탄원하므로 재조사되고 억울함이 밝혀지므로 영조 임금께서 직첩을 내려 신원(伸冤)해 주시고 복권하여 주셨다.

29세손 희문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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