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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장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조선의 개국이 이루어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 조선을 개국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은 자손으로 풍정공 의룡(義龍 10세) 호조판서(戶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후로 후손들의 자식이 번성하였고 큰 가문이 되었다.
본 파는 제7세 박문오(朴文晤)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의 5남 박윤류(朴允鏐) 군부총량공(軍簿摠郎公)의 후손으로서, 제13세 박리(朴离) 부사공(府使公)의 제1남 박숭인(朴崇仁) 우후공(虞候公)의 우후공파의 파조 (虞候公派 派祖)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직 우후(虞候)'란?
'우후'는 조선시대 각 도(道)의 지방군에 해당하는 절도사(節度使)의 최고 지휘관을 보좌하는 부장(副將) 역할을 하던 무관 벼슬이었다. 병마우후(兵馬虞候)가 종삼품(從三品), 수군우후(水軍虞候)가 정사품(正四品) 지금의 사단장을 보좌하는 부사단장의 역할에 해당한다.
공께서는 조선시대 성종의 즉위를 돕고 국정을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이는 세조 때 시작된 군사 개혁제도가 성종때 완성되던 시기에 나라에 큰공을 세우셨음 증명 한다. 전라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종2품 병사공(兵使公) 한충인(韓忠仁)을 보좌하는 정3품 우후공(虞候公)으로 고위 무관 벼슬로 지내셨다. 전라병마절도사는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는 위치한 오늘날의 사단급 군부대에 해당한다.
이후 중앙군 오위의 벼슬로 수도 한성(현 서울)에 터전을 잡았고 경기도 양주시 노원면 월계리 (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에 향촌을 이루었다. 대대로 무관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사역원 소속의 역관을 많이 배출 하였다.
이후 부산왜관으로 파견을 오게되어 부산과 밀양에 향촌을 이루었으며, 전북 김제와 부안에도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 내용 수정중.

재창(再昌) 21세의 생애는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문화재자료(구)제113호)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다.
계사년(1713) 대마도에 머물 때 인위조린(仁位朝隣)이라는 일본인이 훈도청 의관 종6품 주부(主簿) 박위보(朴偉甫)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고 초상화에 제사(題辭)를 기록했다. 주부(主簿) 박위보(朴偉甫)의 숙부가 바로 재창(再昌) 21세 이다.
1713년 이전에 그려진 이 초상은 18세기 초 의술을 매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맺은 사제 간의 정을 표현한 한일교류의 상징물로 평가받고 있다.
초상으로 남겨진 그림은 성서(星瑞) 22세 이며, 부산 왜관 훈도청에서 일본인과 교류를 하였고 훗날에 역관으로 근무하여 종2품 동지중추부사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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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후공파의 유래를 살펴보기전 대한민국 민족의 성씨(姓氏) 사용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 한다.
대한민국 민족이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특정 시점에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시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기: 4세기 ~ 7세기경
내용: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성씨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왕실과 일부 지배 계층(귀족)만이 성씨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혈통을 신성시하고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컸다.
고구려의 경우 주몽이 '고(高)씨'를 사용했으며, 백제는 왕족이 '부여(扶餘)씨' 또는 '여(余)씨'를 사용했다.
신라는 초기에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였다.
왕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성씨를 내려주는 '사성(賜姓)' 정책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신라 김유신 장군의 가문은 본래 가야 왕족이었으나 신라에 편입되면서 김씨 성을 유지한 경우이다.
특징: 일반 백성 대부분은 성씨 없이 이름만 가지고 있었다. 성씨는 곧 신분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시기: 10세기 ~ 14세기
내용: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국가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성씨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지방의 유력 세력가(호족)들을 중앙 귀족으로 편입 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는 정책(사성 정책)을 활발히 펼쳤다. 이는 호족들에게 지배층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충성을 유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과거 제도(科擧制度)가 도입되면서,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성씨와 본관(本貫)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려던 중간 계층(향리 등)도 성씨를 갖게 되었다.
특징: 성씨 사용이 귀족뿐만 아니라 중앙 관료와 지방 향리 계층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평민이나 노비는 성씨가 없었다.
시기: 15세기 ~ 19세기
내용:
조선 초기에는 양반 사대부 계층은 모두 성씨와 족보(族譜)를 가지고 혈통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조선 중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신분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업이나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평민들이 족보를 사거나(매족, 買族) 위조하여 양반 신분을 얻으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성씨를 갖는 평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군역(軍役)의 부담을 피하거나 사회적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의 성씨를 따르거나, 흔한 성씨를 차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징: 평민 계층에서도 성씨 사용이 점차 일반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내용: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면서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근대적인 호적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 법에 따라 모든 국민은 호적에 성과 이름을 등록해야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이때까지 성씨가 없던 노비, 천민 계층도 모두 성씨를 새로 만들어 등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주인의 성을 따르거나,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가장 흔한 김(金), 이(李), 박(朴) 등의 성씨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징: 모든 국민이 성씨를 갖게 된 결정적인 시기다. 현재 한국의 성씨 분포에 김, 이, 박씨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 중 하나도 이 시기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제7세 박문오(朴文晤)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의 5남 박윤류(朴允鏐) 군부총량공(軍簿摠郎公)의 후손으로서, 제13세 박리(朴离) 부사공(府使公)의 제1남 박숭인(朴崇仁) 우후공(虞候公)의 우후공파의 파조 (虞候公派 派祖)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직 우후(虞候)'란?
'우후'는 조선시대 각 도(道)의 지방군에 해당하는 절도사(節度使)의 최고 지휘관을 보좌하는 부장(副將) 역할을 하던 무관 벼슬이었다. 병마우후(兵馬虞候)가 종삼품(從三品), 수군우후(水軍虞候)가 정사품(正四品) 지금의 사단장을 보좌하는 부사단장의 역할에 해당한다.
공께서는 조선시대 성종의 즉위를 돕고 국정을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이는 세조 때 시작된 군사 개혁제도가 성종때 완성되던 시기에 나라에 큰공을 세우셨음 증명 한다. 전라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종2품 병사공(兵使公) 한충인(韓忠仁)을 보좌하는 정3품 우후공(虞候公)으로 고위 무관 벼슬로 지내셨다. 전라병마절도사는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는 위치한 오늘날의 사단급 군부대에 해당한다.
숭인(崇仁) 14세
성종조((成宗朝) 전라병마절도사 종3품 병마우후(兵馬虞候) 역임.
성종의 즉위를 돕고 국정을 안정시킨 공을 인정받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범(範) 15세
조선시대 중앙군 오위(五衛)의 종6품 관직. 부사과(副司果) 역임.
사후에 공을 인정받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贈職) 되었다.
묘소가 현재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위치
세형(世亨) 16세
조선중기 중종14년 (1519년) 법률 행정 실무관원을 뽑는 율과(律科) 시험에 3등으로 합격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오위(五衛)에 속한 정5품의 무관 관직 사직(司直)을 역임,
업적과 공을 인정받아 사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증직((贈職) 되었다.
묘소가 현재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위치
연수(連壽) 17세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科擧) 시험에 합격
사마(司馬)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관청인 군자감(軍資監)에서 정(正) 벼슬(정3품)을 지냈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1월 24일. 군량미를 운반 중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순절.
이러한 공을 기려 사후에 자헌대부호조판서(資憲大夫戶曹判書)로 추증 되었다.
묘소가 현재 서울 도봉구 월계동에 위치.
대근(大根) 18세
선전관(宣傳官)을 역임.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임진왜란 때 적진을 정탐하여 임금이 계신곳으로 찾아가 직접 보고하였고,
왕께서 이 공으로 특별히 서부참봉(西部參奉) 에 제수하였다. 이후로 국명을 받들어 왜장(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들과 맞서 싸웠으며,
왕릉을 훼손한 적들을 찾아내어 무공(武功)을 빛냈다. 그 공으로 인하여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임명 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피랍된 조선인을 쇄한교섭을 위한 3차례 일본에 건너가 활약하였고, 그 결과로 피랍된 조선인 수천명을 고향으로 복귀하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와 광해군 역시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했음을 문헌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2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史)를 역임했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월계동에 위치
이순(爾淳) 19세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 역임.
정3품 당상관, 소송을 판결하는 일을 맡은 관직.
묘소는 서울 도봉구 월계동에 위치
원랑(元郞) 20세 1620-1679
1636년 병자호란 포로로 잡혀갔고,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 돌아왔으며,
식년시 역과 합격 사역원(司譯院) 소속 역관으로 활동.
직함으로 정9품 왜학훈도(倭學訓導) 활동. 사역원봉사(司譯院奉事) 종8품을 거쳐 부산 동래부로 파견 근무.
이는 각각 일본어 교육·통역 담당하는 사역원 실무직으로 활동. 사후에 국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좌윤(左尹)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월계동에 위치
재창(再昌) 21세
왜학 역관(倭學 譯官), 즉 일본어 전문 통역과 외교를 담당하던 일본어 통역관의 수장.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활동. 그는 외교 실무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조선과 일본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묘소는 밀양 가곡 밀양역 뒷산에 위치
유행(攸行) 24세
호는 초남(初南) 향촌에서 후학을 가르친 스승.
당대의 저명한 학자인 매산 홍직필의 문하에서 공부해 문장과 덕망으로 이름이 높았다.
청도 출신의 성리학자로 알려진 병암屛巖 이규집李圭執(1779-1849)이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밀양(密陽) 외가에 의탁해 자랐다.
11세때 박유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문헌이 남아있다.
묘소는 밀양(密陽) 산내면(山内面) 삼양리 2107에 위치
* 계속 수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