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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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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파

 

영해파 소개(13세 "解"자의  墓碣銘을 통해서)


進勇校尉宣傳官務安朴公解之墓 配宜人豊川任氏 祔東

진용교위 선전관 무안박공 해의 묘 배 의인풍천임씨 부 동쪽

驪州治南十里許有黃鶴山 山之南麓 負坎之原 隆然四尺封者 朝鮮李氏王朝世宗時 進勇校尉宣傳官朴公之幽堂也

여주부( 驪州府남쪽 10리 쯤에 황학산이 있고, 산의 남쪽 기슭 감좌(坎坐)의 언덕에 우뚝 솟은 4척 봉분이 있으니,  조선조 세종때 진용교위 선전관을 지낸 박공의 유택이다.

 

公諱解 姓朴氏 貫務安 高麗國學典酒 諱進昇爲上祖也 

공의 휘는 해()이고 성은 박씨이며 본관은 무안이다고려 때에 국학 전주(國學典酒)를 지낸 휘 진승(進昇)이 상조이다.

 

歷五世 而諱文晤 銀青光祿大夫平章事 綿城府院君 號綿南 於公六代祖也

5대를 내려와 휘 문오(文晤)는 은청광록대부 평장사를 지내고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에 봉해지고 호가 면남(綿南)이신 분이 공의 6대조이다.

 

曾祖諱義龍 開國功臣 官戶``刑三曹判書 領中樞府事 號楓亭 享柄山祠 祖諱綱 刑曹參判 考諱亨 知丹陽郡事 贈戶曹參判 妣貞夫人坡平尹氏 判軍資事琚女

증조부의 휘는 의룡(義龍)으로 개국공신에 봉해지고 관직은 호조, 병조, 형조 삼조의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오른 호가 풍정( 楓亭) 인데 병산사(柄山祠)에 제향되었다. 조부의 휘는 강()으로 형조참판을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형()으로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를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판군자사(判軍資事)를 지낸 ()의 따님이다.

 

公生以太宗十年庚寅京邸第 户參公之四子也

공은 태종 10(1410) 한양 집에서 호조참판공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生而聰悟 有知謀遠慮 世宗朝任南行宣傳官 而至世祖元年丙子 因王位 而多殺戮忠直臣 則遂棄官退居驪州 而至燕山朝 婦姪任士洪專權 則公知其必誤國 故屢次旋召不應 戒諸子以勿近權門

어릴적 부터 총명하고 지모가 원려하였다. 세종조에 남행(南行음직)으로 선전관에 이르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충직한 신하들이 도륙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여주로 물러나 살았다. 연산조에 이르러 부인의 조카인 임사홍이 전권을 부리자 공은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을 알고 여러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니 여러 자제들에게 권세 있는 가문을 멀리하라고 경계하였다.

 

配宜人豊川任氏相國肩之女 生四男四女 長之需四代而絶嗣 次之蒙副司直贈司僕寺正 之升無后 之謙金城縣令

부인 의인 풍천임씨는 상국(찬성) ()의 따님으로 44녀를 두었다. 장남 지수(之需)4대 후에 절손되었고, 차남 지몽(之蒙)은 부사직을 지내고 증직이 사복시 정이고, 지승(之升)은 후손이 없고 지겸(之謙)은 금성현령을 지냈다.

 

女 元孝純 南自尹 鄭偉 鄭麟 孫之蒙男元基進士  良基 榮基龍驤衛右部將贈參議  昌基 仁基

딸은 원효순(元孝純) 남자윤(南自尹) 정위(鄭偉) 정린(鄭麟)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지몽(之蒙)의 아들 원기(元基)는 진사이고, 양기(良基)이고, 영기(榮基)는 용양위 우부장을 지냈으며 증직이 참의이고, 다음은 창기(昌基)  인기(仁基)이다.

 

女 安潤禧縣監 南漢粒進士元基男 鵬參奉  全文科正郎  女 孫寬進士  良基男 世仁 世信 

딸은 현감 안윤희(安潤禧), 진사 남한립(南漢粒)에게 출가했다. 원기(元基)의 아들 붕()은 참봉이고, ()은 문과급제 하여 호조정랑을 지냈다. 딸은 진사 손관(孫寬)에게 시집갔다. 양기의 아들은 세인(世仁)과 세신(世信)이다

 

榮基男 世賢武科節度使 早遊退溪先生門 世廉縣監贈兵曹判書 世淳武科僉樞 昌基男 伸訓導 俔

영기(榮基)의 아들 세현(世賢)은 무과급제 하여 절도사를 지냈는데 일찍이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세렴(世廉)은 영일현감을 지냈고 증직은 병조판서이다. 세순(世淳)은 무과급제 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인기(昌基)의 아들은 훈도를 지낸 신()과 현()이다.   

 

仁基男世振, 鵬男孝長武科萬戶. 全男善長, 文科都事贈吏曹參判.

인기( 仁基)의 아들은 세진(世振)이고, ()의 아들 효장(孝長)은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를 지냈다()의 아들 선장(善長)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世仁男敬長僉樞, 世賢男應長判官. 世廉男毅長, 宣武一等功臣, 贈戶曹判書, 諡武毅, 享九峯書院. 弘長尙州牧使, 掌樂院正.

세인(世仁)의 아들 경장(敬長)은 첨지중추부사이고, 세현(世賢)의 아들 응장(應長)은 판관을 지냈다. 세렴(世廉)의 아들 의장(毅長)은 선무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증직이 호조판서로 시호는 무의공(武毅)이다. 구봉서원에 제향되었다. 홍장(弘長)은 상주목사와 장악원 정을 지냈다.

 

世淳男進長軍資正, 世溫男奇長通政, 俔男源長參奉, 世振男裕長, 之謙男諱循古中和府使, 男麟瑞贈司僕寺正, 男怡贈左承旨. 玄孫以下不錄.

세순(世淳)의 아들 진장(進長)은 군자감 정을 지냈고, 세온(世溫)의 아들 기장(奇長)은 통정대부이고, ()의 아들 원장(源長)은 참봉이고, 세진(世振) 아들은 유장(裕長)이다. 지겸(之謙)의 아들 순고(循古)는 중화부사를 지냈고 아들 인서(麟瑞)는 증직이 사복시 정이고, 아들 이()는 증직이 도승지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而使諸子散居各處, 而唯存者, 寧海與楊州兩派, 而今寧海派最盛矣鴻儒碩學輩出.

지금은 자손들이 각처에 흩허지고  오로지 영해파와 양주파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영해파가 가장 융성하여 홍유와 석학이 배출되었다.

 

中最著者, 五世孫童蒙教官陶窩諱璿 仝五世孫文科判校悔易堂諱???? 六世孫文科司憲府掌令滄洲諱敦復 仝六世孫文科中訓大夫禮曹左郞草堂諱安復 八世孫成均進士畸軒諱龍相 外多數不錄

그중 가장 드러난 사람은 5세손 동몽교관을 지낸 도와(陶窩) 휘 선()과 같은 5세손으로 문과급제 하여 승문원 판교를 지낸 회이당(悔易堂) 휘 한()이 있고, 6세손에 문과급제 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낸 창주(滄洲) 휘 돈복(敦復)과 같은 6세손으로 문과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낸 초당(草堂휘 안복(安復)이고, 8세손에 성균 진사 기헌(畸軒) 휘 용상(龍相)이 있다. 그 외에 많으나 기록하지 않는다.

 

而楊州派, 則六世孫武科, 嘉義大夫, 都摠府副摠管, 諱宣興. 外多數而不盡載矣. 觀譜牒, 則無卒年月日, 然推想公壽八十餘歲矣. 墓所, 則古書所載壬亂以前墓祀多闕而三年或五年一祭則 草木茂盛, 而多失傳云, 理或然矣. 今公之墓, 則後孫畸軒諱龍相公文集中有云 興州宗人進士晚悔堂敬址公, 見其高祖判校公遺集中, 宣傳公墓在於驪之治南勝山寺傍云. 故急遣其子姪, 得之於現所, 則雙墳幷峙, 中有短碣. 倚而不仆, 無陰記, 然前面題字明確, 始認知公墓與宜人豊川任氏之墓也.

 

양주파(楊州派)6세손인 무과급제 하여 가의대부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휘 선흥(宣興) 외에 다수가 있으나 다 적지 않는다. 보첩을 보건대 졸()한 연월일이 없으나, 공의 수()가 팔십여 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묘소에 관해서는 고서에 기록하기를 임란(壬亂) 이전 묘사(墓祀)를 많이 빠뜨려서 삼년 혹은 오년에 한번 지냈다. 이에 초목(草木)이 무성해져서 많이 실전되었다고 하니, 이치상 혹 그렇기도 할 것이다. 지금 공의 묘는 후손 기헌(畸軒) 휘 용상(龍相)공의 문집(文集中)에 이르길, 흥주(興州) 종인 진사 만회당(晩悔堂) 경지(敬址) 공이 고조(高祖) 판교(判校)공 유집 중에 선전(宣傳)공 묘가 여주 남승산사(南勝山寺) 곁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급히 아들과 조카를 보내어 지금의 위치에서 찾았으니 쌍분(雙墳) 병치(倂峙) 가운데 짧은 비석이 하나 기대어 있고, ()가 넘어지지 않았다. 비문은 없으나 다만 앞면의 제자(題字)가 명확하여 공의 묘와 의인(宜人) 풍천(豊川) 임씨(任氏)의 묘임을 알게 되었다.

 

諸孫得墓於數百年蓁荒之餘, 其欣幸倘何如, 而不啻燕人之聞人言而望墓流涕也. 其後晚悔公, 率諸族修墓城, 而備祭田, 祭器與齋舍, 永爲守護之計. 畸軒公記其事, 以四韻詩求和. 諸宗及外裔. 以成卷矣. 其後歷二百年, 而寧海`楊州兩派諸宗, 合謀將竪石, 使後孫寧海派鍾祜, 持畸軒集與譜牒畧錄, 責顯刻之文於不佞. 顧余老廢無文, 辭不獲焉, 謹按來錄而爲序.

여러 후손들은 수백 년 동안 묘가 잡초와 덤불 속에 버려졌다가 찾았으니 그들의 기쁨은 어떠했겠는가. 마치 연()나라 사람이 남의 말을 듣고 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정도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만회공(晚悔公)이 여러 종족을 거느리고 묘역(墓城)을 중수하고 제전(祭田)과 제기(祭器), 재사(齋舍)를 갖추어 영구히 수호할 계책을 세웠다. 기헌공(畸軒公)이 그 일을 기록하여 사()로 사운(四韻) 시를 지어 여러 종족과 외손(外裔)에게 화합을 요청하였고 이를 권()으로 엮었다. 그 뒤 200년을 거쳐 영해(寧海양주(楊州) 두 파()의 여러 종족이 협의하여 비()를 세우기로 하고, 후손인 영해파(寧海派) 종호(鍾祜)가 기헌집(畸軒集)과 족보(譜牒)와 약록(畧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책임을 지우니 내가 늙고 문재(文才)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기록을 보고 삼가 서문를 쓴다

 

명에 이르기를 銘曰

우뚝하도다 박공이여 卓哉朴公

나아감과 물러남을 미리 알고 進退知幾

자식에게 의()와 방()을 가르치셨고. 敎子義方

높은 벼슬을 초개같이 여겼네 軒冕芥視

연하(煙霞)와 천석(泉石) 빼어난 곳에서 烟霞泉石

한가롭게 산수를 즐겼네樂此山水

황학산 남쪽 기슭에 黄鶴南麓

편안히 잠드셨네攸托衣履

아득하게 세상이 바뀌어서  桑海茫茫

기와 송처럼 옛날  알지 못하네 祀宋先天

자손들이 추모하는 효성으로有孫追孝

여러 해를 헤아려 찾은 까닭에推尋多年

이에 책을 써서 因以書卷

 길한 터전을 찾고尋斯吉原

우러러 보는 () 세우며 竪以崇碑

 두터운 향훈을 바치며 獻斯苾芬

천년 만년 오랜 세월 동안千秋萬歲

길이 잘못 없기를 도모하네永圖無愆

 세상의 모든 군자들이여 凡百君子

 명문(銘文) 보라.視此銘文 

 

檀紀四三三二年 己卯 重陽節
                       義城 金日大 謹撰
寧海派宗親會長十四世孫 燦久
楊州派宗親會長十七世孫 成煥
西紀一九九九年十一月二十一日 謹竪

단기 4332(1999) 기묘 중양절 의성 김일대 삼가 짓다.

영해파 종친회장 14세손 찬구

양주파 종친회장 17세손 성환

서기 19991121일 삼가 비를 세우다.

 

국역 인동장씨  장달수

교정수서공13대손박준

교정 남산초당  김송자 

 

 

 

 

                                           朝鮮時代 務安朴氏文科及第者

寧海派順興門中30世 浚 整理

1. 박호朴壕

字仲湥 世祖 丙戌生(1456) 肅川諱臨卿子 燕山朝 壬戌文科 見 諡號篇 (魯城派)

2. 원겸元謙

字希益 成宗辛亥生(1471) 綿城府院君 諱 文晤七代孫 燕山朝 甲子進士 中宗甲戌文科 選湖堂 官禮曹參判 有文集 (砥平派)

3.

字勉夫 號 松坡 中宗甲戌生(1514) 進士元基子 丙午文科 官至戶曹正郞 有松坡文集2(寜海派 順興門中)

4. 지겸之謙

宣傳官 解子 金城縣令 (楊州派)

5. 원눌元訥

字質夫 禮曹參判 元謙弟 中宗丙子(1516)文科 選湖堂 官至北評事 (砥平派)

6.

字仲悅 明宗庚申生(1560) 尙書文正의 후손 天稟英粹才氣俊發 宣祖庚申 司馬同年文科 又 拜北評事 乙丑校理承召途中病患으로 (燕岐門中)

7. 선장善長

字汝仁 號水西 明宗乙卯生(1555) 戶曹正郞 全子 乙巳文科 官至通善郞行慶尙道都事 贈 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 44(1598) 때 명나라 장수에 상서문 보낸 공로로게 보낸 글로서 1885(고종22년 졸 269) 嘉善大夫吏曹參判으로 加贈. 文章學行當代에 드러났고 後進敎養에 힘섰다. 有文集42冊 龜灣書院에 배향됨. (寜海派 順興門中)

8. 돈복敦復

字无悔 號滄洲 宣祖甲辰生(1574) 不祧廟 司僕寺 正 諱之夢5代孫 宣祖丙午 生員 仁祖甲子 文科 歷敭情班累 典州牧 官至司憲府掌令 贈司諫 知製敎丙子倡義事丙子錄에 등재됨. 滄洲文集2이 있음. (寜海派本門中)

9. (+)

字潤甫 號회이당悔易堂 宣祖丙子生(1586) 水西善長次子 癸卯文科 歷典五邑 官至 通訓大夫承文院判校 兼春秋館編修官 善山府使 淸德碑가 있고 悔易堂 文集21이 있음. (寜海派 順興門中)

10. 안복安復

字仲雷 號草堂 宣祖辛丑生(1601) 判校 한의子 甲子生員 己卯(1639) 文科 官至通善郞 禮曹左郞 贈中訓大夫 (寜海派 順興門中)

11. 창한昌漢

字昌卿 逸持平應善孫 戊午庭試文科 官至承旨 (京派)

12.

字 巨源 號淨踈軒 孝宗癸巳生(1653) 草亭應善后 壬戌年 生員 丙寅謁聖文科

歷 翰林三司 銓郞舍人應敎知製 敎承旨 弘文館 提學 有答問禮說遺稿 (京派)

13. 태두泰斗

字景瞻 號悅樂齋 孝宗戊戌生(1658) 滄洲諱敦復曾孫 己卯文科 縣監 成均館司藝

壽職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丁卯 以侍從臣年 九十 陞宰樞 入耆社

文章德望矜式鄕邦 有 悅遺樂稿齋 眠雲齋李周遠撰狀

1753癸酉 享年 96(寜海派本門中)

1. 以侍從臣年 九十 陞宰樞 入耆社; 임금을 가까이 모신 신하로서, 아흔 살의 장수로 宰樞(재상급관직)의 반열에 올랐으며, 사후에는 사직에 배향되었다, 라는 뜻 같습니다.

14.

字澄之 顯宗戊子生(1668) 承旨 昌漢 姪 辛酉試文科 官至右尹 (京派)

15. 이문履文

字仲禮 號古心子 顯宗癸丑生(1663) 右尹澄子 己卯生員 癸未文科 官至 正言,掌令知製敎有文行 (京派)

16. 두상斗相

字士昻 號黙翁 肅宗辛卯生(1681) 同知中樞府事 潚영조 辛酉 文科 監察 (寜海派 慶壽堂門中)

17. 성현聖鉉

字季玉 英祖辛卯(1751) 文科 官至 佐郞

18. 도욱道郁

字斐然 判書 諱義龍 后 進士 文科 官至縣令

19. 경행敬行

字仁則 判書 諱義龍 后 進士 文科 官至縣令

20. 기종淇鍾

字公振 號竹圃 純祖甲申生(1804) 判書 諱義龍 后 哲宗辛酉(1861) 式年試 文科 歷 正言 獻納掌令 掌樂院 正 司諫院 司諫出捕 大同丞從享 柄山祠 (務安派)

21. 종간宗玕

字舜八 高宗壬午(1892) 增廣試 文科及第 任 持平

 

참고문헌

務安朴氏文獻攷 1966丙午

務安朴氏大同譜 2025甲辰譜

 

 

 


 

 

 

 

 

 

 

 

 


 







 


 

 

 

 

 

 

영해파

 

영해파 소개(13세 "解"자의  墓碣銘을 통해서)


進勇校尉宣傳官務安朴公解之墓 配宜人豊川任氏 祔東

진용교위 선전관 무안박공 해의 묘 배 의인풍천임씨 부 동쪽

驪州治南十里許有黃鶴山 山之南麓 負坎之原 隆然四尺封者 朝鮮李氏王朝世宗時 進勇校尉宣傳官朴公之幽堂也

여주부( 驪州府남쪽 10리 쯤에 황학산이 있고, 산의 남쪽 기슭 감좌(坎坐)의 언덕에 우뚝 솟은 4척 봉분이 있으니,  조선조 세종때 진용교위 선전관을 지낸 박공의 유택이다.

 

公諱解 姓朴氏 貫務安 高麗國學典酒 諱進昇爲上祖也 

공의 휘는 해()이고 성은 박씨이며 본관은 무안이다고려 때에 국학 전주(國學典酒)를 지낸 휘 진승(進昇)이 상조이다.

 

歷五世 而諱文晤 銀青光祿大夫平章事 綿城府院君 號綿南 於公六代祖也

5대를 내려와 휘 문오(文晤)는 은청광록대부 평장사를 지내고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에 봉해지고 호가 면남(綿南)이신 분이 공의 6대조이다.

 

曾祖諱義龍 開國功臣 官戶``刑三曹判書 領中樞府事 號楓亭 享柄山祠 祖諱綱 刑曹參判 考諱亨 知丹陽郡事 贈戶曹參判 妣貞夫人坡平尹氏 判軍資事琚女

증조부의 휘는 의룡(義龍)으로 개국공신에 봉해지고 관직은 호조, 병조, 형조 삼조의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오른 호가 풍정( 楓亭) 인데 병산사(柄山祠)에 제향되었다. 조부의 휘는 강()으로 형조참판을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형()으로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를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판군자사(判軍資事)를 지낸 ()의 따님이다.

 

公生以太宗十年庚寅京邸第 户參公之四子也

공은 태종 10(1410) 한양 집에서 호조참판공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生而聰悟 有知謀遠慮 世宗朝任南行宣傳官 而至世祖元年丙子 因王位 而多殺戮忠直臣 則遂棄官退居驪州 而至燕山朝 婦姪任士洪專權 則公知其必誤國 故屢次旋召不應 戒諸子以勿近權門

어릴적 부터 총명하고 지모가 원려하였다. 세종조에 남행(南行음직)으로 선전관에 이르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충직한 신하들이 도륙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여주로 물러나 살았다. 연산조에 이르러 부인의 조카인 임사홍이 전권을 부리자 공은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을 알고 여러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니 여러 자제들에게 권세 있는 가문을 멀리하라고 경계하였다.

 

配宜人豊川任氏相國肩之女 生四男四女 長之需四代而絶嗣 次之蒙副司直贈司僕寺正 之升無后 之謙金城縣令

부인 의인 풍천임씨는 상국(찬성) ()의 따님으로 44녀를 두었다. 장남 지수(之需)4대 후에 절손되었고, 차남 지몽(之蒙)은 부사직을 지내고 증직이 사복시 정이고, 지승(之升)은 후손이 없고 지겸(之謙)은 금성현령을 지냈다.

 

女 元孝純 南自尹 鄭偉 鄭麟 孫之蒙男元基進士  良基 榮基龍驤衛右部將贈參議  昌基 仁基

딸은 원효순(元孝純) 남자윤(南自尹) 정위(鄭偉) 정린(鄭麟)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지몽(之蒙)의 아들 원기(元基)는 진사이고, 양기(良基)이고, 영기(榮基)는 용양위 우부장을 지냈으며 증직이 참의이고, 다음은 창기(昌基)  인기(仁基)이다.

 

女 安潤禧縣監 南漢粒進士元基男 鵬參奉  全文科正郎  女 孫寬進士  良基男 世仁 世信 

딸은 현감 안윤희(安潤禧), 진사 남한립(南漢粒)에게 출가했다. 원기(元基)의 아들 붕()은 참봉이고, ()은 문과급제 하여 호조정랑을 지냈다. 딸은 진사 손관(孫寬)에게 시집갔다. 양기의 아들은 세인(世仁)과 세신(世信)이다

 

榮基男 世賢武科節度使 早遊退溪先生門 世廉縣監贈兵曹判書 世淳武科僉樞 昌基男 伸訓導 俔

영기(榮基)의 아들 세현(世賢)은 무과급제 하여 절도사를 지냈는데 일찍이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세렴(世廉)은 영일현감을 지냈고 증직은 병조판서이다. 세순(世淳)은 무과급제 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인기(昌基)의 아들은 훈도를 지낸 신()과 현()이다.   

 

仁基男世振, 鵬男孝長武科萬戶. 全男善長, 文科都事贈吏曹參判.

인기( 仁基)의 아들은 세진(世振)이고, ()의 아들 효장(孝長)은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를 지냈다()의 아들 선장(善長)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世仁男敬長僉樞, 世賢男應長判官. 世廉男毅長, 宣武一等功臣, 贈戶曹判書, 諡武毅, 享九峯書院. 弘長尙州牧使, 掌樂院正.

세인(世仁)의 아들 경장(敬長)은 첨지중추부사이고, 세현(世賢)의 아들 응장(應長)은 판관을 지냈다. 세렴(世廉)의 아들 의장(毅長)은 선무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증직이 호조판서로 시호는 무의공(武毅)이다. 구봉서원에 제향되었다. 홍장(弘長)은 상주목사와 장악원 정을 지냈다.

 

世淳男進長軍資正, 世溫男奇長通政, 俔男源長參奉, 世振男裕長, 之謙男諱循古中和府使, 男麟瑞贈司僕寺正, 男怡贈左承旨. 玄孫以下不錄.

세순(世淳)의 아들 진장(進長)은 군자감 정을 지냈고, 세온(世溫)의 아들 기장(奇長)은 통정대부이고, ()의 아들 원장(源長)은 참봉이고, 세진(世振) 아들은 유장(裕長)이다. 지겸(之謙)의 아들 순고(循古)는 중화부사를 지냈고 아들 인서(麟瑞)는 증직이 사복시 정이고, 아들 이()는 증직이 도승지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而使諸子散居各處, 而唯存者, 寧海與楊州兩派, 而今寧海派最盛矣鴻儒碩學輩出.

지금은 자손들이 각처에 흩허지고  오로지 영해파와 양주파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영해파가 가장 융성하여 홍유와 석학이 배출되었다.

 

中最著者, 五世孫童蒙教官陶窩諱璿 仝五世孫文科判校悔易堂諱???? 六世孫文科司憲府掌令滄洲諱敦復 仝六世孫文科中訓大夫禮曹左郞草堂諱安復 八世孫成均進士畸軒諱龍相 外多數不錄

그중 가장 드러난 사람은 5세손 동몽교관을 지낸 도와(陶窩) 휘 선()과 같은 5세손으로 문과급제 하여 승문원 판교를 지낸 회이당(悔易堂) 휘 한()이 있고, 6세손에 문과급제 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낸 창주(滄洲) 휘 돈복(敦復)과 같은 6세손으로 문과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낸 초당(草堂휘 안복(安復)이고, 8세손에 성균 진사 기헌(畸軒) 휘 용상(龍相)이 있다. 그 외에 많으나 기록하지 않는다.

 

而楊州派, 則六世孫武科, 嘉義大夫, 都摠府副摠管, 諱宣興. 外多數而不盡載矣. 觀譜牒, 則無卒年月日, 然推想公壽八十餘歲矣. 墓所, 則古書所載壬亂以前墓祀多闕而三年或五年一祭則 草木茂盛, 而多失傳云, 理或然矣. 今公之墓, 則後孫畸軒諱龍相公文集中有云 興州宗人進士晚悔堂敬址公, 見其高祖判校公遺集中, 宣傳公墓在於驪之治南勝山寺傍云. 故急遣其子姪, 得之於現所, 則雙墳幷峙, 中有短碣. 倚而不仆, 無陰記, 然前面題字明確, 始認知公墓與宜人豊川任氏之墓也.

 

양주파(楊州派)6세손인 무과급제 하여 가의대부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휘 선흥(宣興) 외에 다수가 있으나 다 적지 않는다. 보첩을 보건대 졸()한 연월일이 없으나, 공의 수()가 팔십여 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묘소에 관해서는 고서에 기록하기를 임란(壬亂) 이전 묘사(墓祀)를 많이 빠뜨려서 삼년 혹은 오년에 한번 지냈다. 이에 초목(草木)이 무성해져서 많이 실전되었다고 하니, 이치상 혹 그렇기도 할 것이다. 지금 공의 묘는 후손 기헌(畸軒) 휘 용상(龍相)공의 문집(文集中)에 이르길, 흥주(興州) 종인 진사 만회당(晩悔堂) 경지(敬址) 공이 고조(高祖) 판교(判校)공 유집 중에 선전(宣傳)공 묘가 여주 남승산사(南勝山寺) 곁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급히 아들과 조카를 보내어 지금의 위치에서 찾았으니 쌍분(雙墳) 병치(倂峙) 가운데 짧은 비석이 하나 기대어 있고, ()가 넘어지지 않았다. 비문은 없으나 다만 앞면의 제자(題字)가 명확하여 공의 묘와 의인(宜人) 풍천(豊川) 임씨(任氏)의 묘임을 알게 되었다.

 

諸孫得墓於數百年蓁荒之餘, 其欣幸倘何如, 而不啻燕人之聞人言而望墓流涕也. 其後晚悔公, 率諸族修墓城, 而備祭田, 祭器與齋舍, 永爲守護之計. 畸軒公記其事, 以四韻詩求和. 諸宗及外裔. 以成卷矣. 其後歷二百年, 而寧海`楊州兩派諸宗, 合謀將竪石, 使後孫寧海派鍾祜, 持畸軒集與譜牒畧錄, 責顯刻之文於不佞. 顧余老廢無文, 辭不獲焉, 謹按來錄而爲序.

여러 후손들은 수백 년 동안 묘가 잡초와 덤불 속에 버려졌다가 찾았으니 그들의 기쁨은 어떠했겠는가. 마치 연()나라 사람이 남의 말을 듣고 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정도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만회공(晚悔公)이 여러 종족을 거느리고 묘역(墓城)을 중수하고 제전(祭田)과 제기(祭器), 재사(齋舍)를 갖추어 영구히 수호할 계책을 세웠다. 기헌공(畸軒公)이 그 일을 기록하여 사()로 사운(四韻) 시를 지어 여러 종족과 외손(外裔)에게 화합을 요청하였고 이를 권()으로 엮었다. 그 뒤 200년을 거쳐 영해(寧海양주(楊州) 두 파()의 여러 종족이 협의하여 비()를 세우기로 하고, 후손인 영해파(寧海派) 종호(鍾祜)가 기헌집(畸軒集)과 족보(譜牒)와 약록(畧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책임을 지우니 내가 늙고 문재(文才)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기록을 보고 삼가 서문를 쓴다

 

명에 이르기를 銘曰

우뚝하도다 박공이여 卓哉朴公

나아감과 물러남을 미리 알고 進退知幾

자식에게 의()와 방()을 가르치셨고. 敎子義方

높은 벼슬을 초개같이 여겼네 軒冕芥視

연하(煙霞)와 천석(泉石) 빼어난 곳에서 烟霞泉石

한가롭게 산수를 즐겼네樂此山水

황학산 남쪽 기슭에 黄鶴南麓

편안히 잠드셨네攸托衣履

아득하게 세상이 바뀌어서  桑海茫茫

기와 송처럼 옛날  알지 못하네 祀宋先天

자손들이 추모하는 효성으로有孫追孝

여러 해를 헤아려 찾은 까닭에推尋多年

이에 책을 써서 因以書卷

 길한 터전을 찾고尋斯吉原

우러러 보는 () 세우며 竪以崇碑

 두터운 향훈을 바치며 獻斯苾芬

천년 만년 오랜 세월 동안千秋萬歲

길이 잘못 없기를 도모하네永圖無愆

 세상의 모든 군자들이여 凡百君子

 명문(銘文) 보라.視此銘文 

 

檀紀四三三二年 己卯 重陽節
                       義城 金日大 謹撰
寧海派宗親會長十四世孫 燦久
楊州派宗親會長十七世孫 成煥
西紀一九九九年十一月二十一日 謹竪

단기 4332(1999) 기묘 중양절 의성 김일대 삼가 짓다.

영해파 종친회장 14세손 찬구

양주파 종친회장 17세손 성환

서기 19991121일 삼가 비를 세우다.

 

국역 인동장씨  장달수

교정수서공13대손박준

교정 남산초당  김송자